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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운동을 기념하여 제정된 대한민국의 국경일이자 공휴일입니다. 


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시초로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었습니다.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2005년 12월 29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로 개정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1절은 1919년 대한민국의 독립선언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족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전국 초·중·고생 3천919명을 상대로 "3·1절 관련 학생인식에 관한 조사"를 한 결과 40%가 3·1절의 의미를 모르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2019년 3월 1일은 3.1만세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에서는 많은 기념행사가 준비중이라고 합니다. 




기념사업 주요내용 요약 


 핵심 사업 : 104개

ㅇ 위원회 연계 수행 : 22 / 위원회 지원․관리* : 82 (중앙 69, 지방 13)


* 위원회와 관계부처가 공동 기획·추진, 위원회의 집행·관리 대상 사업


※ 관계기관 자체사업 : 관계부처 및 자치단체 등에서 총 579개 사업 추진

 사업 예산 : 655억원

ㅇ 위원회 : 30억원 / 관계부처 : 625억원 (계속 412억, 신규 213억)


* 자치단체 추진 13개 핵심사업은 지방비 등 예산 확보 중 (‘18.12월 현재)


 10대 역점사업

① 국민과 함께하는 기념행사 및 문화 콘텐츠 제작 (위원회·관계부처)

② 100주년 기념 평화공원 및 상징 조형물 조성 검토 (위원회)

③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 (건립위원회·국조실·보훈처)

④ 효창공원의 독립공원화 (위원회·보훈처·서울시)

⑤ 중국 충칭 광복군 총사령부 복원·보존 (보훈처·외교부)

⑥ 민주․인권․평화 박람회 개최 및 민주․인권 기념관 건립 (행안부·인권위)

⑦ 평화·번영을 위한 ‘3·1절 100주년 남북공동행사’ (위원회·통일부)

⑧ 동양평화 기원, 남북공동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 (위원회·보훈처)

⑨ 평화․공영의 발전적 협력을 위한 미래 100년 전망 (위원회)

⑩ 국민대토론회, 참여 인증 등 국민참여 활성화 (위원회)


위의 내용은 100주년 기념사업 종합계획을 인용하였습니다. 



역사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습니다.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참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파리강화회의에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한국 대표를 급파했습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막한 사흘 후인 1월 21일에는 고종이 급사했습니다. 


국내외적 상황이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 종교계와 학생들이 독립운동 준비에 나섰습니다. 


때마침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서울은 3‧1운동을 잉태한 곳이었습니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서울만이 아니라 지방의 종교 지도자들을 아울러 민족대표를 꾸렸고 경향각지에서 서울로 유학 온 학생들은 일사분란하게 독립시위를 준비했습니다.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는 이른 새벽에 학생들이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정오 무렵부터 학교를 빠져나온 학생들은 속속 탑골공원에 집결했습니다. 


반면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였습니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갖고 경찰에 그 소식을 알렸습니다. 


곧 헌병과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같은 시각 수천 명이 운집한 탑골공원에서는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습니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서울 시내는 만세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3월 1일에 서울에서만 만세시위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양․진남포․안주(평남), 선천․의주(평북)․ 원산(함남) 등 6개 도시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서울을 제외하고는 모두 북부지방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평양에서는 오후 1시에 장로교,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내로 나와 연합시위를 벌였습니다.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진남포에서는 오후 2시에 감리교와 감리교계 학교 교사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천도교인과 노동자들도 참여했다. 안주에서 오후 5시에 일어난 만세시위는 기독교 청년지도자들이 주도했습니다. 


선천에서는 장로교계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정오에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거리로 나서 만세시위를 벌였습니다. 


천도교인들도 가담했습니다. 


의주에서는 오후 2시 30분에 기독교인과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이 주도하고 천도교인이 연대한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원산에서는 오후 2시에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이 연대해 만세시위를 벌였다.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함께 했습니다. 


이처럼 서울을 포함해 7군데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들은 연대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7군데 모두 철도역을 갖춘 도시로서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날 혹은 당일 날 전달받아 낭독했습니다. 


전국에서 매일같이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3월 1일 7군데 도시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는 다음날부터 인근지역으로 확산되어갔습니다. 


3월 1일부터 14일까지 2주간 전국에서 일어난 276회의 만세시위 중 70%를 웃도는 197회가 북부지방에서 일어났습니다. 


3월 중순을 넘어서는 경기도를 중심으로 중남부 지방에서 주로 일어났습니다. 


3월 하순에 다시 북부지방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지면서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 만세시위의 절정기를 이뤘습니다. 


매일 50~60여회에 이르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만세시위의 양상은 도시와 농촌이 달랐습니다. 


3‧1운동은 도시에서 시작되어 농촌으로 번져갔습니다.


도시에서는 종교인과 학생들이 만세시위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학생들은 시위를 모의하고 주도했으며 등교를 거부하는 동맹휴학을 전개했습니다.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으로 동참했습니다. 상인들은 상점 문을 닫는 철시투쟁을 벌였습니다. 


 농촌 시위는 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장터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번화한 거리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고 만세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옛날부터 농민항쟁에 자주 등장한 횃불시위, 봉화시위도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3‧1운동은 도시나 농촌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시위를 주도했고 동참했습니다. 


민족의 일원으로서 누구든 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고자 했던 자발성은 폭발적이었습니다. 


유림, 식민통치에 협조하던 면장․구장과 같은 관리는 물론 청소년들까지 누구든 조직하고 참여하는 자발성, 그것이 3‧1운동이 전국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게 만든 힘이었습니다. 




스크린에서도 17살 유관순의 항거에 대한 이야기가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줄거리는  


1919년 3.1 만세운동 후 세평도 안 되는 서대문 감옥 8호실 속, 영혼만은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유관순과 8호실 여성들의 1년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여주인공 유관순 역에 고아성이 캐스팅 되어 2월27일 개봉 예정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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